청호웹진 9월호

깨달음의 구현자, 붓다

인내하는 부처님

- 이필원 / 청호불교문화원 연구소장 -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법을 말씀하시다

누군가 나에게 욕설을 하면, 듣는 순간 나의 마음에는 분노와 당황스러움 등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마도 누구나가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가 무례하게 나를 대한다고 생각되면, 그때에도 분노가 일어난다. 우리 삶은 늘 분노가 일어날 준비를 갖춘 상황들의 연속이다. 때로는 내가 분노유발자가 되기도 한다. 아니 아마도 많은 경우 그럴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능숙하다. 한편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은 결코 놓치지 않는 예리한 관찰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를 요즘 말로 하면, ‘내로남불’이 아닐까?

부처님 당시, 악꼬사까 바라드와자 (Akkosaka Bhāradvāja)라고 불리는 바라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욕쟁이 바라드와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입이 매우 거칠어 시비걸기를 좋아한 사람인 셈이다. 그는 바라문 계급으로서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현실에, 그는 매우 분노해 있었다. 자신이 만약 부처님을 보게 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그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왔다. 바로 부처님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악꼬사까는 부처님께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당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욕을 다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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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서에서는 그가 한 욕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는데, “도둑놈, 바보, 멍청이, 낙타, 황소, 당나귀”와 같은 욕을 했다고 전한다. 요즘 욕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욕 같지는 않은데, ‘낙타, 황소, 당나귀’와 같이 동물을 빗대어 욕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이 중, 당나귀는 “고집 세고 어리석은 멍청이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자타카』에서는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는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자”를 의미한다. 낙타나 황소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욕’이란 상대방에게 모욕을 안겨주는 가장 강력한 언어폭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욕을 듣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같거나 더한 욕으로 돌려주거나, 아니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심하면 두고두고 원한을 품게 되기도 한다.

악꼬사까의 욕 세례를 받은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욕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는데, 부처님은 일단 상대를 응시하며 침묵으로 대하셨다. 즉, 욕설하는 사람에게 당황한 모습이나, 분노에 찬 모습이 아닌 평온한 얼굴로 그를 대한 것이다. 악코사까는 마치 벽에 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상대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욕을 하던 사람도 지치게 마련이다. 허공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까. 욕도 주고받아야 신나서 하는 것이다. 상승작용이 있어야 지치지 않고 분기탱천하여 상대를 더욱 몰아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악꼬사까는 제풀에 지쳐 욕을 그만할 수 밖에 없었다. 욕을 그친 그에게 부처님은 대화를 시도한다.

[붓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에게 친구나 동료 또는 친지나 친족 또는 손님들이 방문하는 때가 있습니까?”

[악꼬사까] “고따마여, 나에게 때때로 친구나 동료 또는 친지나 친족 또는 손님들이 찾아온다.”

[붓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그대는 그들에게 단단하거나 연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합니까?”

[악꼬사까] “고따마여, 나는 그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한다.”

[붓다] “바라문이여, 만약 그들이 그것들을 먹지 않고 그냥 가면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악꼬사까] “고따마여, 만약 그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가 먹는다.”

[붓다]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받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따라서 그대가 한 욕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하는 사람에게 다시 욕을 한다면,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할 생각이 없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한 욕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러자 악꼬사까는 부처님이 화를 내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시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보통 분노를 참으라고 한다. 그런데 분노를 참기만 하면 ‘화병’이 생기며, 그것이 폭발하면 참혹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교에서 ‘인내(khanti)’는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것’, 혹은 ‘동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나에게 모욕을 주고, 비방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우리 삶의 목표의 완성을 위해서 인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그러나 인내는 참기 어려운 것은 견디어 낸다는 의미로 “인내와 용서는 최고의 고행이다.” 『담마빠다』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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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몸이 아플 때면, 다 낫기 전까지 치료를 하면서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는 오히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다. 참아야 하는 것이니 ‘참는 것일 뿐’이지, 거기에 다른 어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고통은 있지만, 고통을 경험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무아의 실현인 것이다.

악꼬사까의 온갖 욕설에 부처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분노를 삼키지도 않았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울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비춘 것처럼, 욕설을 하는 악꼬사카를 비춘 것이다. 다만 그뿐이었던 것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본 악꼬사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출가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한 수행의 완성자가 되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악한 자에게 인내하는 양상이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십일면관음보살의 경우, 마두관음은 분노존으로 표현된다. 이 때 분노는 악을 물리치는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 이는 악을 다스리는 치료제로써 ‘분노’를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지, 분노가 보살에게 일어난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관세음보살은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악을 제거하기 위해 자비를 분노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 자비의 분노는 악을 행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구원해주는 자비의 손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