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9월호

성보순례 5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 이기선 / 청호불교문화원 도서관장 -

남산 장창골〔長倉谷〕 절터에서 석조미륵여래삼존상 발견

이번 호의 성보 순례는 천년왕국의 수도였던 경주를 찾아가려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실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전시품 가운데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南山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이란 표제(標題)가 적힌 석조불상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 전시실에는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을 취하고 있는 본존(本尊) 여래상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각각 화관(花冠)을 쓴 보살입상이 모시고 서 있는〔侍立〕 삼존상(三尊像)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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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은 모두 원각상(圓刻像)이다. 본존인 미륵여래는 무릎을 굽혀 두 다리를 벌려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불상에서 이런 자세는 입상이나 좌상에 비해 드물지만 인도에서 비롯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도 조성된 예를 찾을 수 있다. 때때로 두 다리가 엇갈려 X자형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둥근 얼굴은 깎은 머리에 정수리에는 나지막하게 솟은 육계(肉髻)가 있다.

두 귀의 귓불은 늘어져 어깨 위에 닿았다. 눈두덩은 삼국시대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행인형(杏仁形)이란 형식을 보인다. 코끝이 아쉽게도 깨졌다. 인중은 짧은 편이고 작은 입술의 양 끝부분이 깊이 파여 ‘고졸의 미소(archaic smile)’의 느낌을 준다. 목에도 삼도(三道)가 보이지 않는다. 법의(法衣)는 두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인데 옷자락이 U자형을 이루며 열려, 왼 어깨에서 오른 어깨 쪽으로 비스듬히 걸친 엄액의(掩腋衣)와 더불어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드러나 보인다. 앞가슴 중앙에는 (Shrivatsa, 室利靺瑳=吉祥海雲의 뜻)이란 기호(記號)를 돋을새김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는데, 엄지손가락을 뺀 네 손가락은 살며시 주먹을 쥐듯이 구부렸다. 왼손은 손등을 왼무릎 위에 얹은 채 옷자락을 잡고 있다. 법의는 온몸을 덮고 있는데 옷주름은 융기선(隆起線)으로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른쪽 무릎과 정강이 부분에서 소용돌이무늬〔渦文〕처럼 표현한 점이고, 또한 불신(佛身)의 측면과 두 손에 걸쳐 아래로 늘어진 옷주름이 접쳐진 표현에서 그리스어 알파벳의 ‘Ω’ 자를 닮은 삼각천단형(三角尖端形)으로 처리된 표현이다. 여래상의 앉은 높이가 162센티미터이다.

두 보살은 서 있는 모습인데 높이가 90센티미터이다. 신체의 비율을 보면 머리가 크고 몸이 작아 4등신(等身)으로 보이고 있는데, 이 비율은 어린아이의 신체 비례에 가깝다.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 표정과 더불어 천진(天眞)스런 어린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보살을 두고 ‘아기부처’라고 불러왔다. 언뜻 보면 두 보살상은 쌍둥이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리에는 넓은 관대(冠帶)를 두르고 앞과 양옆에 꽃장식을 붙인 것이나, 꽃송이를 단 목걸이를 걸고 있고, 손목에 둥근 팔찌〔완천(腕釧)〕를 찬 것 등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존상의 구성에서 좌우가 대칭을 이루기 위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부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손의 자세가 다르다. 우협시(右脇侍) 보살은 오른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어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 배 앞에서 줄기를 받들고 있다. 좌협시 보살은 연잎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은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펼쳤다. 또한 목걸이의 착용에서도 우협신 보살은 아래쪽으로 늘어진 반면에 죄협시는 목에 밭게 착용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도 앞면 중앙의 것은 복련화좌(伏蓮花座) 위에 세 알의 구슬〔三顆寶珠〕로 꾸민 데 비해 좌협시 보살은 한 개의 보배구슬로 장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동안(童顏)에 흠집을 낸 것은 코끝이 깨진 점이다.

이 삼존상은 신라의 성지(聖地)를 이루었던 경주 남산에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아 있는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 삼존불은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이던 1925년 4월에 당시 경주박물관에 반입(搬入)된 것으로 기록되고 1930년 10월 10일자로 정리 · 등록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경주 남산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경주 남산은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산의 모습〔地形〕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려 긴 타원을 이루고 있으나 북쪽 끝부분은 동서 폭이 좁고 남쪽은 동서 폭이 약간 넓다.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 · 해목령(蟹目嶺) · 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 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들에는 석탑 · 마애불 · 석불 · 절터 등이 산재해 있다.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 때문에 경주남산을 일러 ‘야외 박물관’이라 일컬기도 하며, 2000년 12월 유네스코(UNESCO)가 문화유적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은데, 남산은 이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전체 면적에 포함되어 있다.

남산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불적(佛蹟)에 있다. 남산이 불교의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전반기부터로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본격화되어 현재까지 절터를 포함한 건물지 112개 소, 석불 53구, 석탑 64기, 석등 16기가 발견 조사되어 하나의 거대한 노천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절터 가운데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명(寺名)을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도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축대와 석불, 석탑 등은 당시의 웅장했던 남산의 모습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연과 종교 신앙이 일체가 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산의 불적(佛蹟) 그 자체는 신라인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불국토의 세계나 다름없다. -<『特別展, 慶州南山 』, 국립경주박물관, 1995. p.6.>

앞서 말한 석조미륵삼존상은 남산 장창골〔長倉谷〕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산에 지역에 속하는 장창골은 이곳에 장창지(長倉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4년에 발간된 『경주남산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장창곡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계곡은 북쪽의 식혜곡과 함께 서남산에서 가장 넓은 평지로 흘러내리고 있다. 산산신성 창고지 부근에서 계곡이 시작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장전곡(藏田谷)이라고고 한다.

장창곡으로 흐르는 개울은 해목령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흘러오는 큰 곡의 여울과 남산신성 장창지에서 서쪽으로 흘러오는 개울이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부근에서 합쳐져 나정과 장창곡 제3사지(傳昌林寺址) 사이의 금광못을 지나 형산강인 기린내로 흘러간다. 이 계곡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정(蘿井)과 양산대로 추정되는 언덕 및 전 창림사지, 전 일성황릉, 남산산성 등의 다양한 유적이 있어 신라 건국의 기원지로 알려진 것처럼, 남산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곡에 속한다”고 한다.

또한 같은 책에서는 ‘장창곡 제10사지(삼존불출토절토)’로 명명하고, “장창곡에서 불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북쪽 능선을 오르면 소나무 뒤편으로 세 개의 석주형 석재가 있는 곳이 석조미륵삼존불상이 출토된 곳이다. 건물지는 서남쪽 상부에 분묘 3기가 위치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주형 석재 가운데는 분묘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으로는 호석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적고 있다.

page 경주 남산 장창곡 석실에서 안치되었던 모습
page 경주 남산 장창곡 여래상

앞에서 이 석조미륵삼존상이 경주 남산 장창곡에서 1925년에 4월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였는데, 이는 1930년 10월 20일 자로 정리 등록된 경주박물관 자료에 기록에 의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삼존상이 한꺼번에 옮겨진 것이 아니다. 1925년 4월에는 여래상만 남산 북봉의 석실(石室)에서 먼저 옮겨졌고,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북봉의 서쪽 아래에 있는 탑동(塔洞) 부락 민가(民家)에서 발견, 압수되었고, 그리고 현재 여래상의 좌대는 여래상이 옮겨진 그 해 석실(石室)에서 경주시 탑동(天恩寺址) 이우성(李雨成)씨 집으로 옮겨져 장독대로 사용되다가 그 후 1939년 1월 21일에 당시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당시 경주박물관장에 의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964년 이래로 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박사의 몇 차례의 현지 조사와 당시 박물관에 근무했던 박일훈(朴日薰)·최남주(崔南柱)씨와의 서신(書信) 그리고 보살상을 직접 지게 지어 운반했다고 하는 김성개(金成介, 1968년 당시 67세) 등의 증언을 청취한 끝에 밝혀진 사실이다.

황수영 박사는 옛 경주박물관 집고관(集古觀)에 진열되어 있던 이들 석조상에 일찍부터 주목하여 왔다. “소속 사원의 명칭 등 가지가지 관계지견(關係知見)은 거의 상실되었고 따라서 그 조상인연(造像因緣)과 예배 대상으로서의 의의(意義)를 잃고 하나의 진열품(陳列品)으로서의 각별의 번호(番號)와 자리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일찍이 받아오던 불도(佛徒)의 향화(香花)와 공양(供養)을 다시 받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봉안사원(奉安寺院)과 그곳에서의 안치방식(安置方式)이나 존명(尊名) 또는 오랜 전래(傳來)의 경위 등은 밝혀지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 석상 3구가 모두 신라 조각사의 첫머리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 같은 우미품(優美品)에 대한 하나의 기초적인 작업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작은 정성은 반드시 적지 않은 보답을 안겨 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이들 석상(石象)이 차지하는 그 자리를 밝힘으로써 신라 초기 조각사를 위한 일기점(一基點)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어 온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집념과 노력으로 「경주남산 장창곡에서 옮겨진 삼존석상」(연세대 『史學會誌』 제7호, 1964년 12월)을 발표하고, 이어서 「新羅南山三花嶺彌勒世尊」(『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년 3월, 을유문화사)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황수영 박사는 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해 경주 남산에 원재(原在)하던 삼존석상은 고신라 말기 선덕여왕 13년 갑진(서기 644)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生義寺石彌勒〉(『삼국유사』권제3「제4 탑상편) 곧 〈남산 삼화령미륵세존〉으로 비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화령미륵세존’은 『삼국유사』권제2, 「제2 기이편」‘경덕왕과 충담사·표훈대덕’조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충담사(忠談師)가 매양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린다는 그 불상인 것이다. 충담사는 향가 〈안민가(安民歌)〉와 기파랑을 노래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로도 이름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