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9월호

알레테이아,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 이야기 5

철학적 사유로서의 에로스

- 김영철 / 동국대학교 교수 -

에로스(eros)와 사랑에 빠진 철학

철학이란 용어를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사랑의 신 에로스(eros) 이야기이다. 에로스는 플라톤 대화편 <향연>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철학을 상징하는 신으로 큰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철학적 사유를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page eros사진(https://kr.freepik.com/)

에로스적 사랑은 그 유명도로 인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그중 하나는 어떤 것에 대한 추구 혹은 열정으로 해석하여 철학을 열정적 사랑으로 표현한다. 사실 그 열정은 너무나 아름다운 에로스, 즉 에로스적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로스적 사랑으로서의 열정(pathos)은 어떤 것에 대한 갈망으로 이야기된다. 어떤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가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열정적인 사유의 대상은 자신에게 결핍된 무엇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결핍된 무엇을 질문하는 것은 철학이 행해야 할 고유한 책무이다. 그래서 철학이 질문하는 모습은 에로스적 사랑으로 묘사된다.

에로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실, 에로스는 고대 그리스 최초의 역사학자인 헤시오도스(Hesiodos)가 신들의 족보를 엮어 편찬한 <신통기>에 등장한 이래 다양한 성격으로 묘사되면서 유명하게 된 신이다. <신통기>에서 묘사하는 에로스는 삶의 신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해석하는 에로스는 사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신이라기보다는 열정적인 삶을 상징하는 신이다. 말하자면 에로스는 최초 혼돈(카오스, kaos)의 대지(가이아, gaia)에 질서(코스모스, kosmos)를 부여하는 신이자, 이 세상을 생성하고 변화토록 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열정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에로스가 생성과 소멸을 주재하는 신이라는 사실에는 역동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긍정의 역동성이다. 중요한 사실은 소멸에는 생성을 가능케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소멸하기 이전보다 더 발전된 새로운 생성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힌두(교)에서도 소멸과 파괴의 신인 시바(Shiva)를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Brahma)보다 더 존경하며 경배한다. 우리에게는 영화 <시바의 여왕>으로 더 유명하지 싶지만... 그리고 역동적이면서도 이러한 긍정의 변화를 변증법, 즉 변증법적 사유라고 칭한다. 변증법이라고 하면 독일의 근대 철학자 헤겔(Hegel)을 창시자로 생각하지만, 사실 변증법적 사유의 출발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철학자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이다.

그는 우주 만물은 소멸과 생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변화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라는 유명한 말이다.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는 오직 소멸과 생성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원리인 로고스(logos)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뜻이지만, 결론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소멸하고 생성하지만, 즉 변화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원리인 로고스만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참고로, 그리스 말 로고스(logos)는 원리를 뜻한다. 로직(logic)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싶다. 어쩌면, “만물은 불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이 더 유명할지 모르겠다. 사실, 불은 그냥 타는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촛불의 심지처럼 계속해서 소멸과 생성의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불은 소멸과 생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세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page 출처 : Herakleitos(https://simple.wikipedia.org)

다시 에로스로 돌아가자! 에로스의 역동성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에로스는 앞서 말했듯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사랑 이야기 속에서 에로스는 어떤 결핍된 존재로 묘사된다. 뭔가 부족한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상태의 존재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항상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열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자신에게 결핍된 어떤 것을 끊임없이 찾고 보완하려는 모습으로, 더 발전하고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고자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로스의 이러한 모습을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여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향연>에 반쪽 인간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원래 인간은 양성(兩性)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양성의 인간은 힘이 장사였다. 하지만 양성 인간의 힘이 너무 세다고 생각한 제우스는 인간을 둘로 쪼개 버렸다. 둘로 쪼개져 반쪽짜리가 된 인간은 또 다른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사실, 그 지혜로운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에로스가 육체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사랑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스승으로 상징되는 디오티마(Diotima)에게 던지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예상하듯이 에로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신적 사랑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지만.

에로스적 사랑은 잃어버린 자기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의미도 갖는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에로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묘사되어 있다. 제우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신들을 초대한다. 이때 초대받은 신 중에 포로스(poros)라는 풍요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남자 신이 있었다. 이 포로스 신은 잔치에서 술에 취해 정원에서 잠이 들어 버린다. 이때 잔치에는 초대받지 못했지만, 주변을 배회하던 페니아(penia)라는 궁핍과 추함의 여신이 낮잠 자는 포로스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동침하여, 에로스라는 사랑의 신이 탄생한다.

그리고 부모의 상반된 특성, 즉 아버지의 완전함과 어머니의 불완전함을 모두 물려받은 에로스는 풍요와 결핍,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어쩌면 가슴이 시리도록 가여운 존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모습은 부족한 현재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역동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즉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보다 풍요롭고 완전한 삶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열정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에로스적 사랑은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욕망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내면에 있는 본래의 참된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정화(카타르시스, katharsis)하는 열정을 뜻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철학적 사유라고 표현한다. 현재의 기준에서 나를 성찰하면서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유의 모든 과정을 뜻한다. 어쩌면 현재 나의 상황은 육체적인 욕망이나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을 망각도록 하여, 거짓된 자기 모습만을 보도록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육체의 눈 대신에 내면의 정신적인 눈으로 나와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야 비로소 나 자신의 무지,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자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 즉 되돌리고자 하는 열정이자 에로스적 사랑인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