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에 손을 내밀어 보자.
음악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대략 19세기를 뜻한다. 이 시대는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주로 궁정이나 귀족들이, 고전주의 후반기에는 더 많은 중산층들이 음악을 즐겼다면, 낭만주의 시대에는 정말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많은 도시에 연주회장이 건립되고, 도시 관현악단이 설립되어 음악회 관람의 진입장벽이 낮아졌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고전시대 이후 피아노의 생산이 활발해지고, 각 가정의 응접실에 피아노를 놓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중산층 이상에서는 가정음악회를 열어 노래를 부르고 실내악을 연주하는 아마추어 음악애호가들이 생겼다.
슈베르트 초상화
이렇듯 여러모로 풍성했던 낭만주의 음악 사조의 시작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9)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년합창단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빈 소년 합창단은 현재 하이든, 모차르트, 브루크너와 함께 슈베르트의 이름을 딴 네 개의 팀으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변성기를 지나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작곡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곧 프리랜서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내성적이었는데, 작품들도 수줍고 겸손한 그의 성격처럼 유연하고 서정적이었다.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베토벤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으로 매우 달랐다. 규모가 큰 장르의 음악보다는 아기자기한 작품들과 잘 어울렸던 그는 시(詩)와 음악을 결합시키는 예술가곡(Lied)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의 초기 작품인 <들장미>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한 소년이 보았네. 들에 핀 장미, 갓 피어 아침처럼 고운 그 장미를. 소년은 가까이 보려고 달려갔네. 큰 기쁨으로 바라보았네. 들에 핀 그 장미를.” 아무 걱정 없는 소년 슈베르트의 모습과 같이 천진하고 명랑한 느낌이다. 그는 이때 평생의 벗이 될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고, 시인, 철학자, 법률가, 화가 등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훗날 슈베르트를 위해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연주모임을 만들어 그의 활동을 지지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고, 허약했던 슈베르트에게 큰 힘이 되는 친구들이었다.

